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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직신학 문답 Theology Q & 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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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성례의 본질

(i) 교회는 그 구성원들에게 거룩한 예식을 베풀어 줄 의무와 특권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을 sacra-ment, 즉 성례라고 부른다. 동방교회에서는 그 신비적 효과를 강조하기 위하여 mysterion, 즉 신비한 예식이라고 부르는 반면, 일부 전통에서는 단순히 그것이 그리스도에 의해 제정되었기 때문에 ordinance, 즉 규례라고 부르기도 한다.

(ii) 성례가 말씀을 가리워버린 중세교회의 잘못에 반동적으로 종교개혁자들이 말씀을 강조하며 성례를 부차적인 은혜의 방편으로 격하시키는 오류를 범하였다. 성례 없는 말씀은 가능하지만 말씀 없는 성례는 불완전하다는 논거를 제시하지만, 말씀과 성례는 분리될 수 없다. 예수 그리스도가 성례의 원형(Ursacrament)으로서, 성례를 통하여 표상하는 십자가와 부활의 대속을 동시에 말씀하고 행동하신 실존이다. 성례는 구원의 역사적 드라마를 생생하게 재현하며 참여하고 연결하는 회상과 선포와 소망의 행위예술이며, 성령의 역사를 통하여 체현되고 적용된다. 

(iii) 성례는 세 가지 요소, 즉 외적 혹은 감각적 표지(material externa), 내면적이고 영적인 은혜(material interna), 그리고

양자의 성례적 연합(forma sacramenti)으로 구성된다. 성례가 "비가시적 은혜의 가시적 표지"라는 어거스틴의 정의가 널리 추종된다. 그러나 성례는 단지 하나의 표지(sign)가 아니라 동시에 구원과 연합을 확립하는 봉인(seal)이기도 하다. 로마 카톨릭 교회가 자동적 효능(ex opere operato)을 주장하는 반면에, 개신 교회는  수혜자의 신앙과 성령의 작용이 있어야 효력을 발생한다고 생각한다. 또한, 그 효능의 이해에 있어서 사실론과 상징론, 신의 행위와 인간의 행위, 구약 성례와 신약 성례의 연속성과 불연속성 사이에 큰 차이를 보인다.

(iv) 그러나, 성례가 하나님에 의해 제정되고 명령되고 교회에 위임되었다는 사실에 동의하며, 따라서 모든 교회는 성례가 필수적이고 교회의 모든 구성원에게 요구된다고 믿는다. 그 은택과 기능으로는 신앙의 확립과 성장, 영적 양육과 강화, 신앙의 고백과 실천, 그리스도 구속 사건의 생동적인 기억과 헌신, 하나님 은혜의 교통, 그리스도와의 친밀한 연합 등이 제시된다. 또한, 세례가 그리스도의 몸에 접붙여지는 가입의식이고 성찬이 한 몸과 한 피를 함께 나누는 일체의식이기 때문에 성례는 공동체의식의 회복과 나아가 우주적인 그리스도의 몸이 하나임을 재인식하는 교회연합 의식이기도 하며, 성도 간의 연합뿐 아니라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와 삼위 하나님에게 더욱 더 친밀하게 연합하는 효과를 가진다. 성례는 그리스도인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통시화하는 감사와 헌신과 소망의 예배형식이다.

 

2. 성례의 형태들

(i) 초대교회는 의미 있는 예식들을 매우 자유롭게 성례라고 불렀으며, "어거스틴은 수십 가지의 성례를 언급하였다."(White, 15) 그러나, 피터 롬 바르드는 그의 The Sentences(1150)에서 성례를 7가지로 제한하였다: 세례, 입교(견진), 성찬, 참회(고해), 종부, 안수, 그리고 혼례. 그것이 리용회의(1274)에서 확인되었고 플로렌스 회의(1439)에서 공식화 되었으며, 트렌트 회의(1545-63)는 "더도 덜도 아닌 7가지"로 종결지었다. 그들은 이 7가지가 모두 신에 의해 제정되었다고 주장하면서, 다음과 같은 성경적 근거를 제시하였다: 견진(행 8:17, 14:22, 19:6, 히 6:2), 고해(약 5:16), 종부(막 6:13, 약 5:14), 그리고 혼례(엡 5:32).

(ii) 로마 카톨릭의 성례주의와 사제주의에 반대하여, 개혁자들은 그리스도에 의해 제정되지 않은 5가지를 거부하고 오로지 2가지, 즉 세례와 성찬만을 교회의 성례로 인정하였다. 그들은 사도나 교회가 성례를 제정할 권리가 없다고 부정하였다. 일부 극단적인 신령주의적 개혁자들은 어떤 물질적 성례도 거부하였다.

(iii) 그러나 마르틴 루터는 고해의 혜택을 강하게 인정하였다: "나는 세상의 모든 보물을 다 준다해도 고해를 포기하지 않겠다." 그래서 고해가 아우그스부르그 신앙고백에 포함되어 있으며, 초기의 일부 개신교 신앙고백들에도 그러하다. 도날드 블뢰쉬는 그것을 목회 상담이나 치유과학으로 대치시킨 것을 아쉬어 하면서 고해의 회복 가능성을 논의하였다. 진젠도르프 백작은 혼례가 성례로 인정되어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성례들을 회복하고 강화하려는 현대의 동향을 고려하면서, 제임스 화이트는 성례의 3가지 범주 도입을 제안하였다: 복음적 성례, 사도적 성례, 그리고 자연적 성례.

 

3. 세례

 

(i) 세례(baptism)는 신구약 중간기에 개발되었으며, 세례 요한이 그것을 보편화시켰다. 예수님도 세례를 받았고 자기의 모든 제자들과 신자들이 세례를 받도록 명령하였기 때문에(마 28:19, 막 16:16), 교회는 이에 순종하여 세례를 시행하였다. 로마 카톨릭교회는 세례가 구원에 필수적이라고 절대화하는 반면, 개신교회는 세례의 의무는 인정하되 구원은 믿음만으로 가능하다고 상대화한다. 이러한 신앙주의는 세례를 무용화하여 일부교회는 개인에게 선택의 자유를 주기도 하고, 쾌이커나 구세군은 아예 세례제도를 폐지하였다. 그러나, 예수님은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막 16:16)이라고 선언함으로서 신앙뿐 아니라 세례가 구원에 필수적임을 확인하였다.

(ii) 예수님이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요 3:5)고 확언하셨기 때문에, 구원을 위해 물세례와 성령세례 두 가지가 필수적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전적 성화를 위해 제2의 은총이 필요하다는 웨슬리의 가르침이나 성령 세례를 회심 이후의 체험이라고 보는 오순절운동의 이해가 확산되자, 교회에서 전통적으로 그것을 회심의 경험과 동일시하였기 때문에 상당한 혼란과 논쟁이 야기되었다. 세례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의 세례가 성령 세례가 될 것이라고 예언하였으나(마 3:11, 막 1:8, 눅 3:16, 요 1:33), 성경에는 그와 같은 일이 있었다는 기록이 없으며, 오히려 예수님은 성령 세례가 부활 이후, 성령이 강림한 후에 시작될 것이라고 예고하셨다: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행 1:5) 그것이 오순절에 성취되었으나, 성령의 충만으로 표현되었을 뿐이다. 후에, 성령 세례가 오로지 행 11:16에서 언급되었는데, 거기서 베드로는 성령을 받으리라는 예수님의 예언을 상기하면서 성령으로 세례 받는 것을 성령을 받는 것과 동일시하였다: "내가 말을 시작할 때에 성령이 저희에게 임하시기를 처음 우리에게 하신 것과 같이 하는지라. 내가 주의 말씀에 요한은 물로 세례를 주었으나 너희는 성령으로 세례 받으리라 하신 것이 생각났노라. 그런즉 하나님이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주신 것과 같은 선물을 저희에게도 주셨도다." 성령의 선물이 물 세례 이전에 일어나기도 하고(행 10:47-48, 11:15-17), 어떤 경우에는 물 세례 후에 일어났지만(행 2:38), 양자는 불가분리하게 연결되어 있다.

(iii) 성령 세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완전한 세례에 이르는 오랜 발전의 역사를 알아야 한다. 구약에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의 성결을 상징하는 두 가지 의식, 즉 결례(hatat, hagnismos)와 할례(mulah, peritome)를 요구하셨다. 그러나 이 예표적인 의식들은 그리스도가 율법의 요구를 완성하셨기 때문에 신약시대에 폐기되었다. 할례는 마음의 할례(peritome kardias)라는 개념이 도입되면서 내면화되었다. 이제, 그것은 그리스도의 할례(peritome tou Christou)로 표현되었다. 할례 대신, 새 언약에 속한 신자들은 세례(baptisma)를 받도록 요구되었는데, 그것은 두 종류, 즉 물 세례와 성령 세례를 포함한다. 물 세례가 세례 요한에 의해 도입되었지만, 그것은 "회개의 세례"(행 19:4)였고,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요구된 물 세례는 사죄와 구원의 세례였다. 그러나 물 세례는 오로지 성령의 능력으로 수행되는 진정한 사죄와 구원의 세례를 상징할 뿐이었기 때문에(벧전 3:21), 그것은 영혼에서 죄악을 실제로 씻어내는 세례, 즉 성령 세례가 없이는 실효가 없었다. 그것은 성령이 충만할 때 또는 성령을 받을 때 이루어진다. 여기서, 성령 세례가 비록 완전한 세례이지만, 상징적으로 혹은 실제로 죄를 씻어내는 행위인 세례의 한 종류라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이 그것을 올바로 이해하는데 결정적이다.

(iv) 성령은 하나되게 하는 영으로서, 세례의 통일성으로 교회의 하나됨을 수립하고 유지한다(엡 4:5):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고전 12:13) 그러므로, 그것이 물 세례이든 성령 세례이든, 세례를 여러 등급이나 종류로 나누는 것은 잘못이다.

(v) 교회의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세례 명령은 세례의 본질적 요소를 잘 보여준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 28:18-20)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막 16:16)

대속의 성취와 그리스도의 승귀가 세례의 근거이며, 믿음과 헌신이 세례의 예비조건과 전제이고, 모든 계명의 순종이 세례 받은 자의 약속과 의무이다. 세례 문구인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는 세례의 조건과 내용인 삼위 하나님과의 인격적 지식과 관계가 필수적임을 암시한다. 어떤 경우에는, 사도들이 "주 예수의 이름으로"(행 19:5) 세례를 주었다. 물 세례는 실제로 죄를 씻어내고 용서해 주는 성령 세례가 생성한 신앙의 공적 고백과 인정이다. 또한, 그것은 새로운 구성원을 그리스도의 몸으로 영접하는 가입 의식이기도 하다. 따라서, 심지어 이단이나 불법적인 사제에 의한 세례라 할지라도 삼위의 이름과 물로 베푼 세례는 인정하며 재세례를 요구하지 않는다. 그러나 재세례파는 이러한 전통에 도전하였다.

(vi) 세례는 출애급(고전 10:1-2), 할례(골 2:11-12), 그리고 노아 홍수(벧전 3:19-21)의 신약적 형태로 이해되었다. 그것은 그리스도와의 연합, 그리고 그의 몸된 교회와의 연합을 의미한다(고전 12:13). 또한, 그것은 그의 죽음과 부활에의 참여, 그리고 죄의 씻음과 정결하게 함과 용서를 상징한다(행 2:38, 벧전 3:21). 또한, 세례는 자기 부인과 새로운 출발, 성령 받음과 복속, 그리고 회개와 헌신을 동반하는 전인적 행위이며, 최초의 공적 신앙고백으로서 교회뿐 아니라 가족과 사회에 자기의 새로운 정체성을 공표하는 사회적 행위이기도 하다.

(vii) 유아 세례는 성경이 명시하지 않았지만, 초대교회로부터 모든 교회가 계속 시행하여 왔다. 교부 오리겐은 유아세례가 사도들로부터 전수된 교회의 전통임을 증거하며, 칼타고회의(253년)는 유아세례의 정당성을 전제하고 시기를 논의하였다. 그러나 오늘날 일부 유아세례 반대론자들이 부상하여 오로지 믿는 성인의 세례만 정당하다고 주장한다. 신앙이 세례의 "필수 요건"이기 때문에, 유아 세례는 열등하고 해로우며 위험하다고 주장한다. 로마 카톨릭 교회는 세례 중생론(baptismal regeneration)을 주장하지만, 개신교회는 모두 이신칭의 교리에 따라 신앙이 구원에 필수적이라는 사실에 동의한다. 그러면, 신앙고백을 할 수 없는 유아나 신앙고백의 진정성이 인정되지 않는 아동의 경우에는 어떠한가? 신앙이 없다면 구원이 불가능한데, 그렇다면 그들은 모두 구원을 받을 수 없고 그리스도 밖에 있는가? 그들이 어릴 때 죽으면 모두 지옥에 가는가? 부모와 함께 가정과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는데도 단지 신앙고백을 할 수 없다는 이유로 구원에서 배제되어야 하는가? 하나님의 백성에서 어린이를 배제하는 것은 성경적이 아니다(마 19:14, 행 2:39, 고전 7:14). 교회가 인정할 수 있는 성인의 신앙고백을 할 수 없는 것이 곧 신앙이 없는 것인가? 루터는 비록 미개발된 형태이지만 유아에게도 신앙이 있다고 주장하면서 유아세례의 근거로 제시하였다. 그렇다면, 구원받고 교회에 속하는 어린이를 어떻게 구별할 수 있는가? 교회는 믿는 가정의 자녀를 일차적으로 포함시켰다. 이는 구약이나 신약에 믿는 자의 자녀에게도 하나님의 은혜가 부여된다는 성경적 근거(행 16:31)에 기초하였고, 가족을 언약 단위로 인정한 것으로, 신약에 나타난 가족세례(household baptism, 행 16:15, 33)의 실례도 고려하였다. 물론 신약에서 구원은 개인적인 신앙이 전제되지만, 구약에서 유아의 의지에 관계없이 부모가 할례를 받도록 하여 하나님의 회중에 가입시키고 신앙교육을 시켜 독립적 신앙인으로 양육한 것과 유사하게, 신약에서도 자녀의 의지와 관계 없이 교회생활과 신앙교육은 믿는 부모의 의무로 간주되어 왔다. 현대에는 세속화로 인해 신자의 자녀가 교회를 떠나는 예가 빈발하지만, 전통적으로는 유아세례를 받은 자녀들이 모두 독립적 성인 신자가 되었으며, 오늘날에도 이 원칙은 부정될 수 없다. 아브라함 카이퍼가 추정적 중생론(presumptive regeneration)을 주장하였는데, 이는 신자의 자녀가 그들의 삶에서 그에 반하는 분명한 증거가 드러나기 전까지는 중생한 신자로 인정해야 된다는 현실적 이론이다. 자력으로 신앙고백을 할 수 없는 정신지체자나 지적 결손자의 경우 모두 멸망받는다고 정죄하기보다 그들에게는 별도의 기준이 적용되어야 한다(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10장 3절). 마찬가지로 유아나 아동의 구원도 그들에게 맞는 구원의 기준이 적용되어야 한다. 한편, 유아세례 반대론자들은 유아세례를 헌아식(child dedication)으로 대체하려 하지만, 아무런 성경적 근거나 역사적 선례가 없으며 유아의 의지와 관계 없이 부모의 의지로 실행하는 것은 동일하다. 그뿐 아니라, 성인의 신앙고백을 유일한 구원판단의 기준으로 사용한다면 헌아식을 한 아동과 그렇지 못한 아동을 어느모로나 구별하는 것도 아무 정당성을 갖지 못한다. 근본적인 해결책은 천국이 어린이들의 것이라고 하신 예수님의 관점을 교회가 회복하는 것이며, 유아나 아동의 구원과 세례를 성인의 기준으로 판단하는 성인주의(adultism)를 극복하는 것이다.

(viii) 세 가지 세례 방식이 교회에서 사용되었다: 물을 뿌리는 쇄수 세례와 물을 붓는 관수 세례, 그리고 물에 담구는 침수 세례의 방식이다. 침수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의 참여를 충분히 상징하며 세례를 주는 자연스러운 방식이다. 그러나 세례의 상황이 다양하기 때문에, 디다케 7장에 기록된 대로, 초대교회는 상황에 따라 적절히 세례할 수 있는 자유를 허용하였다: "이것이 세례를 주는 방식이다. 이 모든 사실을 공적으로 선포한 다음에, 흐르는 물에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어라. 만일 흐르는 물이 없으면, 다른 방식으로 세례를 주어라. 만일 찬 물이 없으면, 따뜻한 물로 주어도 무방하다. 만일 둘 다 충분히 없으면,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 번 물을 부어라." 침례주의자들(Baptists)은 성경에 사용된 단어 baptizo가 침수를 의미하며 요단강으로 들어가 거기에서(ek) 나왔다는 기록이 침수를 전제하고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다시 산다는 상징성을 침례만이 재현할 수 있기 때문에 오로지 침례가 유일한 세례 방식이라고 주장하지만(웨인 그루뎀), 일반적으로 baptizo는 보다 포괄적으로 사용되며 강에 들어갔다 나왔다는 말이 반드시 물속으로 들어갔다 나왔다는 의미는 아니다. 오히려 고대의 세례 성화는 강 속에 서서 세례받는 모습들이 흔하며, 세례는 성경에서 죽음과 재생의 의미뿐 아니라 다양한 상징성을 가지고 있다. 종교개혁자들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의 참여보다 죄의 씻음과 정결을 세례의 일차적 의미로 이해하였으며, 따라서 물을 붓는 관수 세례를 세례의 모범적 방식으로 선호하였다. 어떤 전통에서는 사죄를 위한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반영하기 위하여 물을 뿌리는 쇄수 세례를 채택하기도 하였다. 겔 36:25도 근거로 제시되었다: "맑은 물로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 정결케 하리라." 칼빈은 세례의 방식은 본질적이 아니기 때문에 지역적 관례를 따르도록 권고하였다.

 

4.성찬

(i) 성찬, 혹은 주의 만찬(Eucharist, Lord's Supper)은 유월절 만찬의 신약적 형태로 그리스도 자신에 의해 제정되었으며, 그가 재림할 때까지 계속 반복적으로 시행하도록 명령되었다. 그것은 마 26:26-29, 막 14:22-25, 눅 22:14-20, 그리고 고전 11:23-34절에 기록되어 있다. 구약의 유월절 만찬(출 12)이 구원의 대표적 예표인 출애급을 바라보며 유월절 어린 양의 피와 살을 소재로 시행된 옛 언약의 참여 의식이라면, 신약의 성찬은 구원의 실체적 사건인 십자가를 바라보며 세상 죄를 지고 죽게될 예수 그리스도의 피와 몸을 상징하는 포도주와 떡을 소재로 시행된 새 언약의 참여 의식이다:

"저희가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을 주시며 가라사대 받아 먹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 하시고, 또 잔을 가지사 사례하시고 저희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그러나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이제부터 내 아버지의 나라에서 새 것으로 너희와 함께 마시는 날까지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마 26:26-29)

“저희가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받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 하시고, 또 잔을 가지사 사례하시고 저희에게 주시니 다 이를 마시매, 가라사대 이것은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하나님 나라에서 새 것으로 마시는 날까지 다시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막 14:22-25)

"때가 이르매 예수께서 사도들과 함께 앉으사 이르시되 내가 고난을 받기 전에 너희와 함께 이 유월절 먹기를 원하고 원하였노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유월절이 하나님의 나라에서 이루기까지 다시 먹지 아니하리라 하시고, 이어 잔을 받으사 사례하시고 가라사대 이것을 갖다가 너희끼리 나누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이제부터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때까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다시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고, 또 떡을 가져 사례하시고 떼어 저희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저녁 먹은 후에 잔도 이와 같이 하여 가라사대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new covenant)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눅 22:14-20)

따라서 성찬의 불참은, 유월절 만찬의 불참이 비극적 죽음과 출애급의 제외를 의미하였던 것처럼, 그리스도의 구원으로부터 제외된다고 경고되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요 6:53)

성찬의 진정한 참여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에 대한 신앙의 인격적 참여이기 때문이다: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 곧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가라사대,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식후에 또한 이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가라사대,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으니,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주의 떡이나 잔을 합당치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피를 범하는 죄가 있느니라. 사람이 자기를 살피고 그 후에야 이 떡을 먹고 이 잔을 마실지니, 주의 몸을 분변치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니라. 이러므로 너희 중에 약한 자와 병든 자가 많고 잠자는 자도 적지 아니하니, 우리가 우리를 살폈으면 판단을 받지 아니하려니와, 우리가 판단을 받는 것은 주께 징계를 받는 것이니 이는 우리로 세상과 함께 죄 정함을 받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그런즉 내 형제들아 먹으러 모일 때에 서로 기다리라. 만일 누구든지 시장하거든 집에서 먹을지니, 이는 너희의 판단 받는 모임이 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그 남은 것은 내가 언제든지 갈 때에 바로잡으리라."(고전 11:23-34)

성찬의 참여조건은 자기 성찰(self-examination)이며, 죄의 회개, 그리고 영적 성장과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으려는 거룩한 열정이 있을 때 그 완전한 효력을 발생한다.

(ii) 성찬의 본질과 효능에 대해 심각한 의견의 불일치가 발생하여 교회를 분열하였다. 로마 교회는 예수님이 떡과 포도주를 축사하신 후 "이것이 내 몸이니라", "내 피니라"고 선언한 은유적 표현을 근거로 교회의 축사를 통하여 성찬의 소재가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화된다는 화체설(transubstantiation)을 주장하였고, 이러한 성찬의 신비적 이해는 과도하게 성찬에 의존하는 심각한 성례주의를 결과하였다. 개신교회는 이에 반발하여 성찬을 격하시켰으나, 루터는 그리스도의 임재가 소재를 대치하지 않고 함께 존재한다는 공재설(consubstantiation)을 주장하였으며, 즈빙글리는 그리스도의 천상적 실존과 성찬의 지상적 실존은 철저히 분리되기 때문에 단지 주관적 기념에 집중해야 된다는 기념설(commemoration)을 주장한 반면, 칼빈은 중간입장을 취하여 비록 두 실존은 존재론적으로 분리되지만 성령의 신비한 역사를 통하여 사실적 임재가 실현된다는 영적 임재설(spiritual presence)을 제시하였다. 이러한 차이는 속성교류에 대한 기독론적 차이에 근거한다. 한편, 성찬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에는 신비적 변화가 전혀 언급되지 않고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고전 11:24-25)는 그리스도 대속의 기념(anamnesis)과 "주의 죽으심을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26)이라는 복음의 선포(katangello)가 성찬의 목적으로 명시되어 있다. 따라서, 카톨릭 신학자 한스 큉도 "(성찬에서) 말씀은 일차적으로 봉헌이나 변화의 기능이 아니라 선포와 증거의 기능을 가지고 있다"고 동의하였다. 또한, 성찬은 그리스도와의 만남과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종말론적 고대, 그리고 성찬의 나눔을 통한 성도의 교제와 주안에서 한 몸임을 확인하는 공동체적 일치감의 회복이라는 기능이 부여되어 있다.

(iii) 예수님께서 베푼 성찬식의 순서를 보면 종합적으로 다음과 같다: (1) 떡을 취한다(lambano), (2) 떡을 축복한다(eulogeo), (3) 떡을 뗀다(klao), (4) 떡을 주며(didomi), (5) 말한다(eipen/legon), (6) 잔을 취한다(lambano), (7) 잔을 감사한다(eucharisteo), (8) 잔을 주며(didomi), (9) 말한다(eipen/legon). 여기서 잔과 달리 떡은 떼는 순서가 있는데, 이는 몸을 찟는 부숨(breaking)을 의미하며 한 몸에 참여함을 강조한다. 또한 떡과 잔 둘 다 주기 전에 먼저 축복과 감사가 필수적으로 요구되는데, 이는 우리를 위해 주신 그의 살과 피를 감사하며 찬양하는 마음이 필수적으로 선행되어야 함을 가르치며, 먼저 주님의 살과 피를 상징하는 떡과 잔을 취하여 들고 시선과 마음을 거기에 집중하며 일치시키는 순서이다. 그리고, 떡과 잔

잔을 주면서 동시에 말을 해야 하는데, 이는 선포의 성격을 가진다. 즉, 성찬은 보이는 복음(the visible Gospel)을 연출하는 거룩한 행위예술로서 복음의 핵심 주제인 그리스도의 대속적 십자가 사건을 재현하면서 언어로 감사하고 찬양하며 선포하고 기념하는 갱신(renewal)의 예배의식이다. 그러나, 성찬은 제사나 연극이 아니라, 인격적 헌신과 증거가 그 본질이다. 유대의 성찬은 당시의 관습에 따라 포도주와 무교병을 사용하였으나 성경에 구체적인 종류에 대한 지정이 전혀 없기 때문에 어떤 빵과 포도주를 사용하는지는 본질에 속하지 않는다.

(iv) 성찬은 초대교회 예배에서 필수불가결한 요소로서, 모든 예배의 본질적 부분으로 시행되었다. 예배의 요소 중에서 성찬만큼 분명하고 강조적으로 명령된 것도 없어서, 초대교회는 이를 성실히 준수하였다. 그러나, 중세 카톨릭의 과도한 성찬집중에 대한 반감으로 일부 개신교회가 성찬을 1년 1-2회로 축소시켰으며, 그것마저도 형식화되었다. 칼빈은 그러한 축소를 "마귀의 간계"라고 비판하고 최소한 매주 1회 거행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기독교강요 IV.xvii.46). 비록 바르트도 예수 그리스도 자신보다 성례라는 의식(ritual)에 집중하는 위험을 지적하였으나, 그리스도 중심적 성례는 복음과 삶을 더 풍요하고 진지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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