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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직신학 문답 Theology Q & A

서론   |   신론   |   인간론   |   기독론   |   구원론   |   교회론   |   종말론   |

1. 교회론의 본질과 중요성

 

(i) 학문으로서의 교회론(ecclesiology)이란 교회에 대한 연구로서, 교회란 무엇이며 어떻게 조직되고 무슨 일을 하며 어떤 혜택을 제공하는지를 연구한다.

(ii) 그러나, 교회가 아직도 살아계시며 교회를 통치하시는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기독교 신앙에 근거하기 때문에, 교회론은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와 성령님의 인도와 능력  아래 자기 백성으로 구성된 자기 교회를 통하여 현재 이  세계에서 역사하는 그의 활동도 논의한다.

 

(iii) 교회론은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의 진정한 교회가 "되며 (be)", 어떻게 그렇게 "행동할 수 있는가(do)"를 스스로 고민하며 스스로 성찰하는 신학적 탐구이다. 그것은 구체적인 교회, 즉 십자가와 부활을 통한 그의 대속 사역 위에 예수 그리스도가 건설한 그의 교회를 다룬다: "내가...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마 16:18-19). 전후 문맥은 이 교회가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 위에 건설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13-17, 20-21절). 그러므로, 진정한 교회론은 조직신학의 순서에서 보는 대로 진정한 기독론과 구원론에 기초한다. 위르겐 몰트만이 강조한 대로, "교회에 대한 모든 언급은 그리스도에 대한 언급이다. 또한 그리스도에 대한 모든 언급은 교회에 대한 언급으로 연결된다." 다시 말해서, "교회론은 오로지 기독론으로부터 개발될 수 있으며, 따라서 교회론은 기독론의 연장이며 그에 상응한다."

(iv) 교회론은 실제적으로 작용하는 기독교의 규범적이며 지시적인 신앙이어서, 그리스도 공동체의 모든 신념과 행위가 교회론에 의존한다. 그러므로, 교회에 대한 오해는 참된 그리스도의 교회가 "되고" 그렇게 "행동하는데" 있어서 심각한 실패를 결과한다. 그것은 집단적으로뿐 아니라 개인적으로도 그러하다.

 

2. 교회의 성경적, 신학적 정의

 

(i) 교회를 의미하는 "Church, Kirche, Kirk"라는 말은 kyriake에서 어원하였는데, 그것은 kyrios 즉 주님에게 속한 것이라는 뜻으로, 교회는 처음부터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 속한 모임이라는 정체성을 분명히 하였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교회를 의미하는 단어로 ekklesia(115회)와 synagogue (57회)가 사용되었는데, 이는 구약의 qahal과 edah에 상응한다. Ekklesia와 qahal은 "부른다 혹은 소집한다(kaleo-qara)"에서, synagoge와 edah는 "모인다 혹은 회집한다(synago-yaad)"에서 어원하였다. 그런데, ecclesia는 점차 그리스도의 교회를, synagogue는 유대교 회당을 의미하는 전문 용어가 되었다.

(ii) 성경에는 교회의 본질을 표현하는 다양한 이미지들이 있다: 그리스도의 몸 (엡 1:22-23, 고전 12:12-27, 4:15-16, 골 1:18, 2:9-10, 19), 하나님의 백성(고후 6:16, 벧전 2:9-10), 하나님의 성전(고전 3:16-17, 엡 2:21-22, 벧전 2:5), 그리스도의 신부(엡 5:23-32, 고후 11:2), 하나님의 가족(딤전 3:15, 5:1-2, 고후 6:18, 마 12:50, 요 1:12), 성도의 공동체(고전 1:2), 새로운 피조물(고후 5:17) 등. 폴 미니어(Paul S. Minear)는 그의 저서 {Images of the Church in the New Testament}에서 교회에 대한 신약의 이미지 96가지를 열거하였다. 그 모든 이미지들은 교회의 풍요하고 역동적인 측면들을 표상하고 서술한다.

 

(iii) 교회를 일반적으로 의미하는 하나님의 백성은 에덴과 이스라엘에 이미 존재하였으나, 교회의 기독교적 개념은 제한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를 명시한다. 대속적 죽음과 승천 이전에, 그리스도는 마 16장에서 영광스럽고 능력 있는 자기 자신의 교회를 설립할 계획을 선포하셨으며, 성례, 권징, 집회, 교육, 그리고 선교와 같은 체계를 제공하셨다(마 18:15-20, 26:26-29, 28:18-20). 더욱이, 교회의 인도와 능력 부여를 위해 성령님을 보내주기로 약속하셨다(요 14:16-18, 26).

 

(iv) 교회의 본질적 성격은 그 주인이며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에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몸은 교회의 일차적 정의이다. 머리와 몸이 교회를 구성하며, 따라서 교회는 totus Christus이다(어거스틴). 몸 없는 머리도 없고, 머리 없는 몸도 없다. 칼 바르트(Karl Barth)가 서술한 대로,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 자신의 실체의 지상역사적인 형태"이며, 한편 "그의 실체의 천상역사적 형태"는 지금 하나님의 우편에 계신다(IV/1, 661). 몸이 그 머리로부터 명령을 받는 행동 기관인 것처럼, 그의 몸인 교회는 그 머리와 주인에게 완전한 순종이 요구된다. 그 결과, 교회는 사명을 수행하는 교회이다. 실로, "교회가 사명을 '가지고 있다’라기 보다 그리스도의 명령 자체가 교회를 창조한다"(몰트만, 10).

 

(v) 종교개혁자들은 교회를 가시적 교회와 불가시적 교회로 구별하였다. 칼 바르트는 불가시적 교회의 개념이 "교회론적 가현설"로서 다른 교회들과의 교제를 거부하는 명분을 제공한다고 비판하였다(IV/1, 653-4). 또한, 전투하는 교회와 승리한 교회, 유기체로서의 교회와 조직으로서의 교회라는 유용한 구별들이 있다. 교회가 신자들을 배태하고 양육하기 때문에 어머니 개념(mater fidelium)이 널리 수용되었다.

 

(vi) 교회의 여러 분파들은 교회를 자기들의 언어로 정의하였다: "선택 받은 자들의 공동체"(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25:1), "화해의 공동체"(PCUSA 1967년 신앙고백), "구원 받은 자들의 모임"(벨직 신앙고백 28), "성도와 참 신자들의 회중"(아우그스부르그 신앙고백 8), "새 언약의 공동체"(감독교회 요리문답), "신앙인들의 회중"(감리교회 신앙고백 13), "세례받은 신자들의 자율적인 지역 회중"(남침례교회 신앙고백 6), "그리스도의 몸과 성령을 통한 하나님의 주민" (하나님의 성회 신앙선언 10), "선택 받은 하나님 백성의 모임"(정교회 신앙고백), "하나님과의 연합 성체, 전 인류와의 연합 성체"(2차 바티칸 문서, 교회의 조직 2).

 

(vii) 현대에 있어서, 서구교회의 세속화, 비서구교회의 부상, 새로운 교회 형태의 발생, 교회연합운동, 그리고 여성신학과 해방신학은 교회로 하여금 교회에 대해서 근본적으로 다시 생각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교회론의 르네상스"가 일어나 거대한 규모의 교회론적 논의를 산출하였다. 또한 이 탈근대적이고 탈 교단적인 시대에 교단주의적 교회론들이 지지 기반을 상실하고 있다. 벨리 마티 카르카이넨 (Veli-Matti Karkkainen)은 "기독교 신학의 미래가 지구적 감수성에 있다"고 예상한다(232).

 

(viii) 애버리 덜레스(Avery Dulles)는 교회의 다섯 가지 모델을 발견하였다: 구원의 기관, 성령의 친밀한 공동체, 구원의 성례, 복음의 선포자, 그리고 섬기는 주님의 종.

3. 교회의 속성과 징표

 

(i) 최초의 공식적인 세계교회 신조인 니케아신경은 "una, sancta, catholica et apostolica ecclesia(하나의 거룩하고 세계적이며 사도적인 교회)"를 고백하였으며, 이는 전 세계교회에서 교회의 4대 속성으로 수용되어 왔다: 단일성, 성결성, 세계성, 그리고 사도성.

몰트만은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기 때문에 교회의 4대 징표가 그리스도의 4대 기능을 반영한다고 이해하였다: "통일하고, 거룩하게 하며, 종합하고 위임하는 그리스도의 주권."(338)

(ii) "하나의 교회(una ecclesia)"라는 개념은 성경적인 근거를 가지고 있으며 신학적으로 필수적이다. 오로지 "하나의 주님, 하나의 신앙, 하나의 세례, 하나의 하나님과 만유의 아버지", "하나의 소망", "하나의 소명", "하나의 성령", 그리고 무엇보다도 하나의 머리가 존재하기 때문에, 오로지 "하나의 몸", 즉 하나의 교회만 있어야 한다(엡 4:4-6). 비록 초대교회에도 수많은 다양성과 차이가 존재하였지만, 이단을 제외한 여하한 분리도 금지되었으며, 주님과 모든 사도들에 의해 정죄되었다. 교회는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고 명령되었다 (4:3). 예수님은 하나됨을 위한 기도의 모범을 보여주셨다: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저희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 (요 17:23). 그러나, 그리스도의 교회는 지금 자체적인 법률 체계와 신조와 이데올로기적 신학이론을 구비한 수많은 상호 경쟁적이고 심지어 적대적인 교파와 교단들로 분열되었으며, 세계에는 9천개에 달하는 교단들이

있다. 교회의 하나됨을 지키기 위해서는 상호 존중의 겸손과 상황적 이해의 사랑이 필요하며, 우월 의식의 자기 교만과 자기 중심적인 상황적 다양성의 부인은 불가피하게 교회의 분열을 결과한다. 동방정교회가 설명하는 대로, "사도 자신들이 설립한 교회는 콘스탄티노플, 알렉산드리아, 안디옥, 예루살렘, 그리고 로마 교구"로 구성되었으며, "각 교구는 행정적으로 독립적으로 운영되었고, 단지 1054년 다른 교구들과 결별한 로마 교구를 제외하고는 모든 교구들이 신앙과 교리, 사도적 전통과 성례, 의식과 예배에 있어서 하나됨을 유지하였다" (정교회 요리문답). 로마 감독의 우월성 주장과 하나의 지역 교구의 세계성 주장이 하나의 머리 아래 있는 교회들의 형제와 같은 평등성을 파괴하였고, 그 결과 교회의 최초 분열을 야기하였다. 로마 "카톨릭" 교회는 여전히 지금도 동일한 입장을 유지하고 있다. 즉, "그리스도가 교회 안에 상하 구조를 창설하셨다... 그리스도가 대학 교수단과 같은 방식으로 제자들을 구성하셨으며 이 제자단 위에 베드로를 위치시켰고... 이 질서는 세상 끝까지 계속된다... 그러므로 교황이 통일의 기반이다"(2차 바티칸 문서, 교회의 조직 6). 이에 따라, "모든 교회는 사도 베드로의 후계자인 로마 교황의 지고한 목자적 관리에 위임되었다... 그러나 동방교회들은 세계적 하나됨으로부터 분리해 나갔다" (동방교회들에 대한 결정 2-3). 비록 그들의 주장이 마 16:17-19, 요 21:15-17에 근거하고 있지만, 신약성경을 전체적으로 볼 때 결코 베드로 아래 모든 사도들이 복속해야 된다는 그의 우위성을 인정하지 않으며, 더욱이 지도권이 영속적으로 후계된다는 주장은 아무런 성경적 근거도 없다. 오히려, 성경은 교회가 사도들의 전체성과 다양성 위에 설립된다는 사실을 분명히 가르치고 있다.

개신교회도 통일성을 지키는데 실패하였다. 이는 성찬이나 교회 정치구조와 같이 비본질적인 문제에 대해 이견을 관용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칼빈과 같은 종교개혁자는 분열을 정죄하였다: "교회로부터의 분리는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것이다"(기독교강요 IV.i.10). 그는 신앙 조목에 대하여 필수적인 것과 비본질적인 것, 근본적인 것과 비근본적인 것을 구별하였다: "하나님이 하나라든지, 그리스도가 신이요 하나님의 아들이라든지, 우리의 구원이 하나님의 자비에 근거한다든지 하는 것과 같은 신앙은 매우 필수적이지만... 다른 교리들은 이견이 있어도 신앙의 하나됨을 파괴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는 비본질적인 문제로 분리하는 것을 금지하였다: "비본질적인 문제에 대한 견해 차이는 어떤 방식으로도 그리스도인들 사이의 분열을 정당화하는 근거로 사용되어서는 안 된다" (IV.i.12). 성경은 아디아포라와 양심의 자유를 허용하며(롬 14장), 바로 그것이 초대교회의 하나됨을 보장하였다. 그러나, 교조주의와 사회집단적 이기주의가 교회 안에 유포되고 심화되면서 교회의 분열이 매우 유행하게 되고 심지어 성경적으로 정당화되게 되었다. 그러나, 서구교회에서 사회적 변화로 말미암아 위기의식이 고조되었고, 18-19세기의 부흥운동과 선교운동이 분열된 교회들로 하여금 20세기에 하나됨을 추구하도록 만들었다. 그 하나의 결과로, 세계교회협의회 (WCC)가 1948년 창설되었고, 로마 카톨릭교회와 동방정교회 사이에도 화해운동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분파와 이단은 구별되어야 한다: "키프리안(Cyprian)이 지적한 대로, 이단과 분파가 둘 다, 사람들이 진리의 원천으로 돌아가지 않고 머리를 추구하지 않으며 천상적 스승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을 때 발생하지만, 이단은 그릇된 가르침으로 신앙의 진지성을 부패시키는 반면, 분파는 심지어 같은 신앙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교제의 유대를 단절하는 것이다"(기독교강요 IV.ii.5). 이단(hairesis)은 모든 교회가 고백하는 기독교 신앙의 본질적 교리와 모순되는 견해를 마음대로 선택하고, 배타적으로 자기들만 옳다고 독선적인 주장을 전개하면서 자기들만의 집단을 구성하고 전체 교회와 단절한다. 사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성육신이나 하나님의 아들임과 육체적 부활, 그리고 재림과 같은 본질적 신앙을 부인하는(골 2:8-23, 요일 4:2-3, 요이 7, 벧후 2:1) "파괴적인 이단들"(벧후 2:1, 딛 3:10, 갈 5:20)을 멀리하도록 경고하였다. 그들은 거짓 선지자와 적 그리스도로 규정된다.

 

 (iii) 교회는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엡 1:4) 의도되었기 때문에 "거룩한 교회 (sancta ecclesia)"가 되어야 하는 운명에 있다. 그리스도의 신부로서,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니라" (5:25-27). 교회는 죄악적 욕심들과 과거의 생활 방식으로부터 해방된 공동체이며, 따라서 이 자유로운 공동체는 거룩한 공동체이다. 비록 교회의 성결성이 "그 자체의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것" (몰트만)이며, "그리스도 즉 머리가 거룩하다는 사실 때문"이어서 "오로지 성령의 선물" (바르트)이지만, 그것이 결코 거룩하라는, 그리고 교회의 성화에 진보를 보이라는 명령을 순종하지 않는 구실이 되어서는 안된다. 바울에게 있어서, 교회는 거룩하게 된 사람들(hegiasmenoi), 즉 성도의 공동체(communio sanctorum) 이다: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입은 자들"(고전 1:2). 그리스도인 개인이 아니라 교회가 성화의 대상이다. 그의 주님이나 그리스도의 몸과의 관계성이나 일체성과 분리된 독립적 정체성이 개인 신자에게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신약에서 신자 개인을 서술하는 "성자 (hagios)"라는 단어가 단수형으로 사용된 적이 없으며 항상 집합적으로 "성도 (hagioi)"라고 호칭되었다. 그러므로, 교회(ecclesia)와 성화의 개념은 불가 분리하며, 교회는 성화의 공동체, 즉 성화의 실체가 나타나는 장(locus)이다. 교회는 도덕적 공동체이며, 따라서 교회의 도덕적 수준은 항상 세상의 그것보다 높아야 한다. 또한, 교회의 성결성은 세계를 성화시키고 죄와 흑암의 세력과 성공적으로 싸워 이기는 유용하고 설득력 있는 도구가 되는데 필수적이다.

 

(iv) 그리스도의 교회는 인종과 민족과 지역과 언어와 문화와 성별과 연령과 모든 사회 집단을 포함하며, 따라서 "세계적인 교회(catholica ecclesia)"이다. "카톨릭 (catholic)"이라는 말은 "kath holou의 준말인 katholikos"에서 왔는데, 어떤 것도 제외하지 않는 전체를 의미한다. 구약교회는 이방인 즉 세계의 모든 다른 민족을 배제하는 민족 교회였고, 또한 자기 백성 중에서도 여자, 어린이, 그리고 장애인을 제외하였다. 인간 타락의 결과로, 인류는 자기 이익을 추구하는 수많은 집단으로 끝없이 분열되었으며, 짐승과 같은 정글의 논리로 강한 집단이 약한 집단을 차별하고 억압하였다. 그리스도가 세상에 오신 것은 인류의 모든 분열되고 적대적인 집단들을 자기 안에서 통일하시기 위해서였다(엡 1:10, 22):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원수 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셨느니라"(엡 2:14-16). 세계의 화해자인 그리스도가 자기 몸에게 계속 화해와 회복의 사역을 하도록 부탁하셨으며, 모든 집단적 이기주의와 사회 집단과의 연대성으로부터 해방된 새로운 자아가 그리스도의 화해 대사가 되도록 창조되었다.

 

(고후 5:15-20)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아무 사람도 육체대로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체대로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이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났나니, 저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주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저희의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이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어 하나님이 우리로 너희를 권면하시는 것 같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구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

 

그러므로, 교회의 세계성은 미로슬라브 볼프(Miroslav Volf)가 "모든 다른 교회들에 대해 열린 자세"라고 표현한 대로 외형적인 혹은 조직적인 내포성의 문제라기 보다 마음과 자세의 문제이다. 교회는 화해와 조화와 사랑의 모델 공동체이며, 따라서 종말론적 공동체이다. 그래서, 교회는 아무 차별 없는 영원하고 이상적인 공동체에 적응하기 위해 권징과 훈련을 필요로 한다.

(v) 그리스도의 교회는 지원에 의한 단체나 자의적인 조직이 아니라 특별한 기원과 독특한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 교회의 머리인 그리스도의 사도들이 교회의 기초와 기둥이다. 교회가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으며(엡 2:20), 바로 사도들이 교회의 "기둥들"(갈 2:9)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교회는 "apostolica ecclesia (사도적인 교회)"이다. 그의 사도들을 통하지 않고서는 진정한 그리스도의 교회가 있을 수 없다. 어떤 교회도 진정하고 참된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사도들의 교회와 역사적 연결과 유대를 필요로 한다. 어떤 교회도 사도들의 교회와 별도로 자기들의 전통을 창조할 권리나 자유가 없다. 그것이 유일한 정통적이며 진정한 전통, 즉 교회의 절대 전통이며, 모든 다른 분파적 전통들은 여기에 복속해야 한다. 그런데, 사도적 전통이란 성경과 다른 별도의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로마교회가 자기들의 전통을 사도들의 성경과 동등하게 위치시켰을 때, 종교개혁자들은 sola Scriptura를 외치며 이에 저항했던 것이다. 교회는 semper reformanda, 즉 지속적 개혁을 실천함으로서 계속하여 자신이 사도적 전통으로부터 이탈하지 않도록 성찰해야 한다.

그러나, 이 말이 교회가 1세기 사도들의 교회와 정확히 동일한 형태를 유지해야 된다는 뜻은 아니다.

성령님께서 계속 변화하는 세상에서 창조적으로 그리고 역동적으로 인도하시기 때문에, 사도성이란 과거 지향적이 아니라 미래 지향적이다. 물론, 성령님이 그리스도의 교회를 그 머리의 뜻과 다른 방향으로 인도하신다는 말은 아니다. 삼위 하나님의 통일성은 발전의 통일성을 보증한다. 교회의 목표와 방향은 이미 그리스도에 의해 부여되고 그의 사도들에 의해 설명되었으며, 성령님은 그 목표를 달성하도록 신실하게 교회를 도우신다. 그러나, 교회는 역사적으로 교회의 목표를 오해하고 자주 성령님의 새로운 인도를 따르지 않고 저항하였다. 그러므로, 교회가 교회의 목표를 분명하게 이해하는 것이 필수적인데, 그것은 하나님의 나라를 지향하는 구속사적 조망을 필요로 한다. 한편, 그것은 교회를 부패와 와해, 세속화와 사유화로부터 보호한다. 교회가 비본질적 문제에 있어서는 자기의 문화와 상황에 창조적으로 적응해도 되지만, 본질적 신앙과 윤리는 사도적 가르침으로부터 변질시키면 안된다. 따라서, 교회의 자유화는 그 사도성으로부터의 결별이다. 반기독교적인 계몽주의 운동의 영향으로, 자유주의 신학이 구 형태와 신 형태로 발생하였으며, 그것은 시대정신(Zeitgeist)에 맞추기 위하여 교회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려고 시도하였다.

 

(vi) 종교개혁자들은 참된 교회를 거짓 교회와 구별하기 위하여 참된 교회의 표징(notae verae ecclesiae) 몇 가지를 제시하였다. 칼빈은 두 가지의 구별하는 표징을 제공하였다: "하나님의 말씀이 순수하게 전파되고 경청되며, 성례가 그리스도의 제정방식에 따라 시행되는 것을 우리가 보면, 거기에 의심의 여지 없이 하나님의 교회가 존재한다" (기독교강요 IV.i.9). 후에, 더 많은 표징이 추가되었다. 그러나, 이 표징들은 본질적이라기 보다 기능적이다.

  

4.교회론의 현대적 동향

 

(i) 기독론적 교회론이 현대의 주요한 경향이다. 자유주의적이고 정치적이며 분파적인 교회론의 개발에 반대하여, 칼 바르트는 바르멘 선언에서 분명히 보는 대로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이며 주님이라는 신학적 각성을 주도하였으며, 교회론 전체를 기독론의 연장과 적용으로 재구성하였다. 이러한 접근방식이 현대 교회론에서 지배적이 되었다. 그러나, 신자유주의 신학, 특히 과정신학과 종교다원주의는 교회를 자연적인 종교조직으로 전락시키고, 그리스도를 익명화함으로서 교회의 머리를 그리스도에서 일반적인 신으로 변경시키려고 시도하였다.

(ii) 선교적 교회론이 선교학자 레슬리 뉴비긴(Lesslie  Newbigin)에 의해서 그의 적지만 강력한 저서 <The Household of God: Lectures on the Nature of the Church>에서 시작되었는데, 이 선교 지향적인 교회론은 주님의 대명령(마 28:19-20)에 기초하였다. 19세기에 깨어나기 시작한 이 선교 의식이 선교와 전도에 대한 새 복음주의적 강조로 인해 20세기에 널리 확산되었다. 국내에서는 이러한 흐름이 선교적 교회론을 개발하였다. 또한, WCC의 missio Dei 개념은 교회의 선교를 사회적 차원으로 확장하였다.

(iii) 공동체(koinonia) 교회론이 평신도 신학자 헨드릭 크램머(Hendrik Kraemer)에 의해 시작되었는데, 이는 communio sanctorum이라는 교회의 사도적 개념과 만인제사장설이라는 종교개혁적 개념을 회복하려고 시도하였다. 성직자와 직분자 중심의 교회론이 이제 섬김의 모델에서 은사 중심적 교회론의 역동적이고 통전적인 개념으로 변화되고 있다. 은사의 나눔을 강조하는 오순절적이며 은사론적인 교회론과, 평등하고 조화를 이루는 교회를 지향하는 삼위일체적 모델이 이러한 경향에 속한다. 이것은 예배와 문화 구조의 변화를 결과한다.

 

(iv) 정치적인 교회론이 디트리히 본회퍼(Dietrich Bonhoeffer)와 위르겐 몰트만에 의해 주도되었는데, "선교적 교회는 비정치적이 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교회의 정치적 실패는 교회의 선교를 방해하고 위태롭게 해왔다. 해방신학은 교회를 가난한 자와 억눌린 자들의 교회로 정의하였는데, 이 풀뿌리 교회론은 사회적 그리고 정치적 억압을 받는 모든 집단에게 확장되었으며, 흑인 교회론, 여성 교회론, 그리고 심지어 환경 교회론을 개발하였다.

 

(v) 에큐메니칼 교회론은 내부와 외부의 압력에 의해 교회 일치의 필요성이 증가되면서 주로 WCC에 의해 개발되었으나, 그 진보적 주도권으로 인해 비 WCC 교회들로부터 강력한 저항을 받았다. 식민주의 이후의 세계질서에서, 교회의 중심이 서구로부터 이동하면서 지구적 교회론이 부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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